커크가 잠이 든 지도 하루가 지났다. 여느때처럼 행성에 교류를 요청하러 다녀온 커크는, 오래 지나지 않아 현기증을 호소하다가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함선에는 비상이 걸렸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스팍이 함장 역할을 대행하기 시작했지만, 대원들은 커크의 부재에 몹시 불안함을 느꼈다. 커크가 이 사실을 듣는다면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깨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실 스팍도 그랬다. 스팍은 커크를 깨워낼 해결책을 찾아내느라 평소보다 더 바빠진 메디베이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러나 스팍이 찾아온다고 해서 커크가 갑자기 눈을 뜨는 기적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커크의 손에 연결되어 식사를 대체할 영양제의 가짓수만 늘어났다. 스팍이 대략 스물두번째쯤 맥코이의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맥코이는 성질을 내면서 손을 휘저으며 내쫓는 대신 패드를 들이밀었다. 커크의 생체 정보가 실시간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거 영 이상해."

맥코이는 유려한 손놀림으로 패드를 조작하였다. 처음 화면을 밀었을 때는 1시간 전의 검진 결과가 나왔다. 이어서 3시간 전, 5시간 전으로 넘어갔다. 이들의 흥미를 자극한 부분은 커크의 뇌였다.

"확실히 수면 중이라고 보기는 어렵군요."
"짐은 지금 본인의 의지로 깨어나지 않는거야."

둘은 동시에 커크를 보았다. 특별히 연구실에 옮겨진 커크는 침대 위에 누워서 죽은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안정적인 패턴으로 오르내리는 바이탈사인이 커크의 생사 여부를 알려주었다.

"어쩌면 의학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지. 최면이라든가. 그 망할 행성에서 말이야."

맥코이는 스팍의 손에서 패드를 빼앗았다. 이미 스팍은 커크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으므로, 제 손에서 무엇이 떠나가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거기서 짐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냈어?"
"아니요. 동행한 대원이 전무해서 원인을 규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우려가 있어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절차가..."
"절차? 외교고 나발이고 난 관심 없어. 짐이 저렇게 됐는데 다 무슨 소용이야?"
"그건..."

스팍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맥코이는 꽉 닫혀버린 스팍의 입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망할 초록피. 맥코이는 욕을 씹어삼키며 돌아섰다. 스팍은 연구실에 태초부터 있었던 구조물처럼, 얌전히 박힌 듯 서있었다. 맥코이로서는 감사한 선택이었다.












아만다는 종종 어린 스팍을 앉혀 놓고 지구의 문물을 가르쳤다. 그것이 그녀가 벌칸에 살면서 가지는 사명이라도 되는 듯. 스팍은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싫어하지 않았다.

"스팍, 이게 뭔줄 아니?"

어떤 날은 아만다가 지구에서 보내온 소포를 뒤지다가, 두꺼운 종이로 된 책을 찾아내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스팍은 표지에 적힌 영어를 곧이 곧대로 읽었다.

"맞아."

아만다가 방긋 웃었다.

"읽어줄까?"

사실, 스팍 혼자서도 너끈히 독파할 수 있는 수준의 책이었다. 그러나 스팍은 거절할 수 없었다. 아만다가 무릎에 저를 앉혀놓고 조근조근 이야기해줄 때의 그 체온과, 정수리에 닿는 따스한 울림이 좋았다. 스팍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렉이 이 광경을 봤다면 '제대로 대답하라'면서 혼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만다는 마냥 기뻐하면서, 스팍에게 손짓을 했다. 스팍은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아만다의 무릎 위로 안착했다. 아만다가 책을 펼쳐 글을 읽기 시작했다.

"... 오로라 공주는 왕자님과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끝! 어때?"
"일부는 타당하지만 일부는 납득이 어렵습니다. 바늘에 찔려 혼수상태에 빠진 것은 파상풍에 걸렸기 때문이지요? 파상풍에 걸리면 심각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음..."

아만다는 제 아들의 동심을 지키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오로라 공주가 잠든 건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야.











한참 커크를 내려다보던 스팍이 그의 손 아래로 제 손을 넣었다. 슬쩍 손가락을 맞대어본다. 커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인간이기에 당연한 노릇이겠지만. 손을 빼지 않은 채로 커크의 얼굴을 보았다. 단단히 감긴 눈커풀 너머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득 저에게 화를 내고 돌아서던 맥코이의 모습이 스친다.

"짐, 전 가끔..."

스팍은 들어주지도 않는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레너드가 부럽습니다."

화내고 싶다. 짐이 이 지경인데 외교가 무슨 상관이냐고 외치면서 무작정 행성으로 쳐들어가 머리채를 잡고 묻고 싶다. 짐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고.

스팍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스팍은 두 손 안에 커크의 손을 가두어 잡고 겨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떨림이 멈췄다. 스팍은 커크의 손등을 덮었던 제 손을 들었다. 잠들어 있는 커크의 얼굴로 시선이 옮겨간다. 스팍은 새삼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맥코이가 자리를 비운 연구실엔 오로지 스팍과 커크 둘 뿐이었다. 50%의 확률. 스팍은 몸을 움직여 좀 더 커크의 머리 옆에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커크의 얼굴 위로 손가락을 얹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함선 전체에 적색경보가 내려져 있었다. 붉은 경고등이 쉴 새 없이 깜빡였다. 스팍은 지체하지 않고 브릿지로 달려갔다. 커크가 있을만한 곳은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브릿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함장석도 비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창 밖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고요했다. 예상과 벗어난 전개에 스팍은 사고가 정지했다. 답지 않게 당황해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브릿지는 물론이거니와, 함선 전체에 대원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숨이 턱 막혔다. 몸의 피가 모조리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커크의 의식이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스팍에게 옮겨지는 중이었다. 서서히 뒷걸음질 치던 스팍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스팍은 그대로 서서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사이렌 소리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차츰 스팍은 안정된 호흡을 되찾았다.

"짐."

주문을 외우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갈만한 장소는 어디일까. 스팍은 부지런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문득 떠오르는 곳이 하나 있었다. 먼저 휴게실을 찾았다. 늘 대원들로 복작거리던 휴게실은 텅 비어서, 어울리지 않게 썰렁했다. 게다가 이 곳마저 붉은 경고등과 사이렌 소리에 점령당해 있었다. 점점 속이 울렁거렸다. 빨리 이 정체 모를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커크를 꺼내야만 했다.

다음엔 커크의 쿼터였다. 평소에는 보안이 걸려 있지만, 의식 속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스팍은 수월하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곳에도 커크는 없었다. 사이렌 소리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복도를 타고 몰려 오는 것 같았다. 스팍은 쫓기듯 다음 장소를 찾아 이동했다. 식당에도 커크는 보이지 않았다. 메디베이는 예상대로 비어 있었다. 스팍은 점점 아랫층으로 내려가면서 범위를 좁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함선의 가장 하단까지 다다랐다.

기관실.

스팍은 사방에 빽빽하게 설치된 기계들 사이를 종횡무진했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시선이 멈췄다. 스콧과 킨저가 업무를 보는 (것을 빙자해 다과파티를 벌이는) 공간이었다. 함선 내의 다른 방들과는 다르게 철로 만들어진 여닫이문이, 깜빡이는 빨간 조명을 받으며 살풋 열려져 있었다. 스팍은 평소 직감으로 움직이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그 틈새는 확실히 스팍에게 어떤 힌트를 주고 있었다. 스팍은 그 안에 갇힌 새가 날아갈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문 틈에 손을 끼워넣고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쭈그리고 앉은 금빛 셔츠의 주인공을 발견했다.

"짐."

스팍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 사이 푸석해진 얼굴이 스팍을 맞이했다. 커크는 환영이라도 본 것처럼 어물거리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스팍이 눈높이를 맞추어 앉았다.

"스카티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스팍이 미처 말을 건네기도 전에 커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스카티는... 함선을 좋아했잖아. 그래서..."
"짐."

커크가 말을 멈추고 스팍을 보았다. 스팍은 부드럽게 커크의 어깨를 쥐었다.

"여기서 나가면 모두 만날 수 있습니다. 스콧도 볼 수 있습니다"
"...다 나를 버린 게 아니야?"
"모두가 함장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커크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스팍이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려 커크의 손을 잡았다. 둘의 손가락이 맞닿았다. 커크가 미약한 신음을 뱉었다.

"그리고 저도, 짐이 보고 싶습니다."
"너였구나."

커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돌았다.

"여기서 울고 있는데 뭔가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잠깐 마음이 편해졌었거든. 그게..."

스팍은 대답 대신 커크의 손등에 입맞춤을 선사했다. 스팍의 입술이 떨어지고, 커크는 마주 잡고 있는 스팍의 손을 슬슬 어루만졌다. 어느 틈에 요란했던 사이렌 소리도, 경고등도 사라져 있었지만 둘은 깨닫지 못했다. 커크가 천천히 스팍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짧은 입맞춤이 아쉬운 듯 다시 한 번 입술을 맞대었다. 스팍은 기꺼이 저를 찾아드는 그를 맞이했다. 점점 함선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스팍의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커크가 눈을 떴다. 커크는 여전히 제 코 앞에서 보이는 스팍의 얼굴 때문에 잠시 혼란스러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누워있는 침대의 감촉과, 기관실이 아닌 메디베이의 풍경은 그가 현실로 돌아왔음을 알려주는 충분한 증거가 되었다.

"스팍."
"다행입니다. 제가 지금 바로 레너드를 불러-"

스팍의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커크가 냅다 멱살을 쥐고 당겨서 키스했기 때문에. 놀라서 눈동자만 굴리던 스팍이 스르르 눈을 감고 커크를 끌어안았다. 점점 키스가 진해져갈 즈음, 연구실 입구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황급히 떨어져서 고개를 돌렸다. 목석처럼 얼어붙은 맥코이의 발치에 패드가 반쪽이 나있었다. 뒤이어 무시무시한 불호령이 연구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제임스 커크, 스팍! 망할 새끼들아! 여기가 무슨 호텔인 줄 알아!!!!"










어머니, 저주라는 건 비상식적인 개념입니다.

하지만 낭만적이지 않니? 진정한 사랑의 키스를 받으면 깨어난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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